Conative Apiaries / En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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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줄을 긋는다는 것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떠한 이유에서건 책에 밑줄을 긋거나 귀퉁이를 접어두거나하는 일은 잘 하지 못한다. 물론 가끔 엄청난 흔적이 몇 책에서 발견되곤 하는데 이런 경우 또한 교과서이거나 문제집일 경우일 뿐이다. (교과서나 문제집도 풀었다는 흔적조차 잘 남기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고등학교 시절에는 선생님께 '넌 왜 그리 책이 깨끗하냐. 공부를 하긴 하는거냐.'라는 핀잔을 자주 듣곤 했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던 나로써는 매우 억울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이런 핀잔은 성적이 잘나와도, 익숙해질법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외화 동전 몇개를 몰래 은행에서 바꿔와 용돈으로 요긴하게 썼던 내가 책도 중고로 팔 수 있음을 알고 그랬던 것일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던 안보던간에 내가 가진 책을 중고로 처분했던적은 올 초 돈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밥을 사먹겠다는 이유로 팔았던 그 한번이 전부니까. 차라리 누굴 주거나 버렸으면 버렸지 판 적은 그 한번이 전부다.

 

아마도 뭐든 잘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겠지만 오늘의 주제는 이게 아니니까. - 왜 늘 나는 자꾸 다른 곳으로 흘러나가버리는가.- 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책을 사기위해 쓰는 돈도 많고 부모님은 가끔 책 읽는걸 말리기도 하신다. 정말로 나보다 많이 읽는 사람들도 많고 책 많이 읽었다는 사람들은 별로 부럽지 않다. 양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도 어려운 일이고 어차피 서로의 관심사는 다른거니까. 그래도 소위 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 중에 매우 부러운 사람들이 있다. 어디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기똥차게 인용해내는 사람들. 물론 이런 이들은 적합한 곳에 잘 인용했을 경우를 말하는거긴 하지만 이런걸 능숙하게 하는 사람 중 대부분은 잘한다. 책의 내용이나 감상 등을 얘기해보자고 하면 나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죽어도 인용이 안된다. 그래서 나름 노력한다고 책 내용을 노트에 베껴써놔보기도 했다. 힘들더라. 옮겨 적는 일도 생각보다 무척 고된 일이고 그 시간에 한번 더 읽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라. 요약해서 적어두면 더 좋겠지만 그건 왠지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리고 손목의 고통보다 더 중요한건 기껏 적어둔 것들이 어느 노트 어느 부분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거다. 그거 정리하려고 또 노트를 만들거나 피씨를 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이런 관리에 능숙하지 않은게 아닐까하고 생각도 해봤는데 다른건 다 관리가 잘 되는데. 적어둔, 기억하고 싶은 글들 보다 훨씬 많은 내 이미지들이 그걸 증명해주는게 아닐까 한다. 어쨌든, 오랜 관찰 끝에 이런 것들을 잘하는 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대개 책을 깨끗이 보지 않더라. 그렇다고 너덜너덜하게 아무데나 굴러다니게 만든다는게 아니라 나름 그들의 법칙대로 줄을 긋고 표시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따로 정리도 하더라. 문득 내 킨들이 떠올랐는데 킨들로 읽는 책에서는 줄도 잘 긋고 Archiving도 엄청 잘한다. 다시 찾기도 잘 찾아내고. 그런데 종이로 읽는 책은 사진을 찍거나 스캔을 하거나 따로 입력하고 싶지는 않더라. 이 무슨 해괴한 성격이란 말인가.

 

그래서 이제 줄을 한 번 그어보기로 했다. 줄만 긋고서 또 관리가 안되어서 책을 더럽혔다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괴로워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어보고 관리해봐야겠다. 하다보면 이것도 늘겠지.

 

덧) 중학교 때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며 다녔던 학원 국어선생님이 날 많이 이뻐해주셨다. 성함도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분이 하셨던 말씀 때문에 책을 더럽히지 않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은 소중한거고 책은 빌려 읽지도 말고 빌려 주지도 말라고. 빌려 읽는 것도 여전히 잘 안되는 부분이고 빌려 주는 대신에 그냥 한권을 더 사서 선물하고 만다. 책을 어떻게 다뤄야 더 소중히 다루는 걸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본다.